제목: 칼럼 2006.6.30.금
아사달의 후예들
석가탑을 창건할 때 신라의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으로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. 그 뒤 아사달은 탑을 만드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.
한편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는 남편 돌아올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의 세월을 보낸다. 너무나 남편이 보고 싶었던 아사녀는 결국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간다.
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.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려고 한다.
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. "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.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.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."
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.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.
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.
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. 아사달은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내를 부르며 미친 듯이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.
남편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던 아사녀가 이 곳 연못에서 기다릴 때 석가탑의 환영이 못에 비추었다 하여 <그림자 못> 즉 <영지(影池)라 한다. 그리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은 <무영탑(無影塔)>이라고 부른다.
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깃들여져 있는 영지는 불국사로부터 서쪽으로 4㎞ 떨어져 있는 저수지로 못가로 길이 나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.
못가의 송림 가운데는 아사달이 아사녀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하는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어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을 전하고 있다.
아사달은 전설적인 석공이다. 한편 석공(石工)은 말 그대로 '돌장이'를 말한다. 돌자귀와 돌메를 이용하여 돌담을 쌓고, 정과 망치로 돌을 깎아 돌하르방을 만든다. 이들 유물들은 석공들의 예술혼이 결집된 유산이다.
석공들이 돌 작업을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쓰는 공구는 '정'과 '망치'다. '정'은 돌을 다듬는데 쓰는 연장으로 타격용 도구인 '망치' 없이는 쓸모가 없다. 때문에 석공들에게 '정'과 '망치'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.
'망치'도 '평날망치'와 '양날망치' 등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. 큰 돌을 할석할 때는 '망치'보다 큰 '메'를 이용하는데 V자 꼴로 만든 '쐐기'가 필요하다.
돌 조형물의 마무리 작업을 할 때는 '도드락망치'를 이용하기도 한다. '도드락망치'는 '정'으로 다듬기 한 뒤 재다듬할 때 쓰는 망치다. 네모진 날에 여러 개의 이빨이 달려있다. 시중에 나와 있는 '도드락망치'는 이빨이 9개, 16개, 25개, 36개짜리가 있는데 수공구용과 전동공구용이 있다.
이밖에 전동공구로 절삭기와 무거운 돌을 세우고 눕힐 때 사용하는 삼각대, 체인 블럭 등이 필요하다.
석공들은 '정'과 '망치', '메'와 '쐐기'등 단순한 연장으로 돌에 혼을 담아낸 사람들이다. 석공들의 숙련된 기술로 만들어 낸 돌하르방· 동자석· 미륵· 돌집· 돌담 등 생명력 넘치는 돌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.
지난 6월16일 전주시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<2006년 전북민속예술경연대회>에 익산지역의 <돌다루기 놀이>가 처음으로 참가하여 관심을 모았다.
익산지역에는 미륵산을 중심으로 주변에 양질의 화강석이 널려 있다. 이를 바탕으로 한 석조문화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.
이러한 석조문화의 저변에는 석공들의 애환이 녹아있다. 석공들은 돌을 채취하여 운반하고, 가공하며, 가공된 석조품을 조립하는 힘든 일을 소화해 내야 한다.
<익산 돌다루기 놀이>에서는 석공들이 힘든 일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작업 도중 부르던 구전노래를 선보였다.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도 실감나게 연출했다. 원석채취, 원석운반(목도), 원석가공, 가공석 운반(목도), 가공석 조립, 기원놀이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.